역사적으로 끊이지 않는 논쟁의 중심에 선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은 캄보디아와 태국 간의 해묵은 태국-캄보디아 국경 분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입니다. 이 고대 유적지는 단순한 문화유산을 넘어, 때로는 양국 간의 치열한 태국-캄보디아 전쟁으로 비화될 만큼 감정적이고 복잡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은 평화로운 사원의 이름 뒤에 숨겨진 국경 분쟁의 원인과 그 파란만장한 전개 과정을 깊이 있게 탐구해 보겠습니다.
갈등과 평화의 역사를 한눈에!
국경의 최전선: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의 기묘한 위치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은 캄보디아 북부와 태국 남동부의 국경 지대에 걸쳐 있는 당그레크 산맥의 가파른 절벽 위에 세워졌습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에서 약 140km, 수도 프놈펜에서는 320k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전략적 요충지로서 고대부터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사원은 오랜 기간 태국-캄보디아 국경 분쟁의 최전선에 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도 한 장이 촉발한 갈등: 1차 소유권 분쟁의 시작
현대에 들어서, 사원은 태국-캄보디아 국경 분쟁의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1904년, 당시 시암(태국)과 프랑스령 캄보디아 간 국경 설정 과정에서 프랑스 측의 지도 제작 오류로 사원 일대가 캄보디아 영토로 잘못 귀속되면서 갈등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1954년 캄보디아가 독립하자 태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사원 일대를 점거하였고, 이는 양국 간의 치열한 태국-캄보디아 전쟁으로 비화될 뻔한 심각한 소유권 논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ICJ)는 프랑스의 지도 오류에도 불구하고 태국이 오랫동안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음을 들어 캄보디아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세계유산 등재와 2차 전쟁의 서막
분쟁은 2008년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캄보디아가 단독으로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했고, 이에 태국은 공동 등재를 주장하며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하지만 2008년 7월 8일, 유네스코는 사원을 캄보디아의 단독 세계유산으로 지정했고, 이는 양국 간 태국-캄보디아 국경 분쟁을 다시 한번 격화시키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2009년에는 태국군의 총격으로 사원 일부가 파괴되기도 했으며, 2011년 4월에는 다시금 국경에서 교전이 발생하여 인명 피해와 주민들의 대피로 이어지는 등 사실상 태국-캄보디아 전쟁의 양상을 띠기도 했습니다
끝나지 않은 갈등, 그리고 미래: 평화를 향한 발자취
계속되는 분쟁 끝에 2013년 11월 11일, 국제사법재판소는 다시 한번 1962년 판결을 재확인하며 사원과 그 주변 영토의 주권이 캄보디아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 태국 군경의 철수를 명령했습니다. 이 판결로 법적인 소유권 논쟁은 종결되었지만, 오랜 기간 지속된 태국-캄보디아 국경 분쟁의 상처와 역사적 감정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은 고대 크메르 제국의 건축 예술을 보여주는 동시에, 국경과 영토, 민족의 자존심이 얽힌 현대사의 복잡한 단면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앞으로 이 사원이 더 이상 전쟁의 흔적이 아닌, 평화와 화합의 상징으로 기억되기를 기대해 봅니다.